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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21. <부정공>귀정공휘병두행장(龜亭公諱秉斗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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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지은공휘형구묘갈명(智隱公諱馨九墓碣銘)
智隱公諱馨九墓碣銘 玉川趙東夏訪余於東陽山中示其叔父永學氏之狀曰惟吾王考志潔行修而爵祿不及門壽不配其德所拒述且散逸不傳東夏以求無負於遺訓而賴有叔父所爲狀庶幾乎萬一今將營樹阡之刻請子爲之銘余曰夫闡揚潜懿乃有德位者事顧余非其人何敢當於是役然余嘗與永學氏同師淵翁相知深矣感念存沒誼不可以非其人而終辭謹按其狀而敍之公諱馨九字致重智隱其號也高麗大將軍諱璋是鼻祖而忠獻公諱元吉官侍中號農隱與圃冶諸賢友善爲世名臣是生虔谷先生諱瑜官副正性至孝罔僕我朝 世宗並鄭其忠孝察訪諱智崙四昆季友愛篤摰有亭相好人到于今稱之梅窓諱大成以校尉隱德不任與一齋李文敬公青莎鄭公爲道義交寔於公爲十世祖曾祖諱宗國祖諱斗采考諱昌源孝友勤儉以世其家妣麗陽陳氏始鑽余壺範克備公二 純廟庚辰正月二十五日生性度簡重才藝頴悟早事擧業尤工筆翰年十四以童子入場屋爲從舊書試卷輒中自是聲譽藉甚公自視欿然以爲餘事事親志物備養有癠必嘗藥殫誠嘗戾洛未近返隣有伴行來彦公所乘船任重見溺公之大人少不爲慮曰吾兒必不入此欿未幾果無羔還省其所以誠身事親此可見矣遭外内艱致毀盡制每當先忌極其嚴敬事庶母亦得歡心嘗赴試知舊有勸循俗求捿徑公不聽曰得失有命但脩其在我者而己自是泊於進取自號曰智隱以其所居直智異山之西欲其隱居行義於其間云治家有法不畜奢華無用之物待夫人既和次敬與四弟及從五昆季同一閈盡其友睦敎子以義方多藏書籍又愛古人筆跡敬慕而傳錄之衣冠必明著几案必凈灑玩樂有相不二家務爲累接人以惠處物以公村人或有夫妻相鬩而輒相止之曰惟恐趙公知之盖公之爲隣里矜式者多如此 太上乙丑十二月遘疾申戒子弟一以勉學修身終不及他事乃於二十四日告終所享年得甲子二百七十六葬于谷城長星洞案山枕乾原夫人慶州金氏父諱星大鷄林君稛后夫人事舊姑以孝順佐夫子以勤敏睦姊姒無間言敎飭子女甚嚴嘗謂其子曰吾聞夫人神主書名禮也汝曹知吾名可矣又曰吾作圓衫擬用於身後粲粲五色不當於未亡人而禮家以深衣爲男女喪通用之服使長婦即製深衣盖夫人之行雖其天性之所然而亦可見公修齊之效矣生後公二年沒後公三十年葬用魯人禮擧四男二女男永鐸永仁永學出爲叔父后永一女適李正宇鄭淵學長房男曰東祐次房男曰東夏東殷東周過房無嗣以東殷爲后季房男曰東協東憲東勉曾玄以下不盡錄噫公容儀端好動止安詳有長自風致以孝友爲一家之定敎成於家不求人知斯足爲好德有恆之士而永學氏既以文學著聞東夏又承家謹飭亦可謂能成公志者也然則繄公之行其可以不銘銘曰智山磅礴蓼水澄泓允矣趙公孝友家聲伊誰與儔千載董生植本自躬厥后彌昌嗚呼趙公可謂不亡 月星 金在洪 撰 지은공휘형구묘갈명(智隱公諱馨九墓碣銘) 玉川 趙東夏가 나를 東陽 산중으로 찾아와서 그의 숙부 永學씨가 쓴 行狀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王考(할아버지)에서는 뜻이 고결하고 행실이 높았으나 爵祿이 가문에 미치지 못하였고, 수명이 그 德에 짝하지 못하였으며 저술한 글이 흩어져 전하지 않습니다. 동하가 그 遺訓을 저버리지 않고자 하여 숙부께서 써 놓으신 행장에 힘입어 그 만분의 하나라도 남기고자 이제 비석을 세워 새기고자 하니, 당신께 銘 지어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나는, 『대저 숨은 덕을 드러내 기리는 것은 德과 벼슬이 있는 사람이 할 일이지, 나같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네. 그러니 어찌 내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일찌기 영학씨와 함께 淵翁(연재 宋秉璿을 말한다)에게서 동문수학하여 서로 깊이 사귀었는데 생살 달리해 느낀 바가 많으니, 자격이 없다고 끝까지 사양할 수만도 없네.』 하고는, 그 행장을 삼가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馨九요, 자는 致重이요, 智隱은 그의 호이다. 고려 대장군 휘 璋이 鼻祖인데, 충헌공 휘 元吉은 벼슬이 侍中이요 호는 農隱으로 圃隱 鄭夢周·冶隱 吉再 등 諸賢과 벗으로 사귀어 당시의 名臣이 되었다. 그가 虔谷先生을 낳으니 諱는 瑜요 벼슬은 副正을 지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고 조선에 벼슬하지 않아 世宗이 그 忠孝를 旌閭하였다. 察訪의 諱는 智崙인데 네 형제가 매우 友愛가 돈독하여 相好亭이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稱嘆하고 있다. 梅牕의 諱는 大成인데 校尉로 德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一齋 李文敬公(李恒)·晴莎 鄭公(鄭沼)과 道義의 벗을 삼았으니, 이분이 公의 十世祖이시다. 曾祖의 諱는 宗國이요, 祖의 諱는 斗采요 考의 諱는 昌源인데 孝友와 勤儉으로 집안을 이어왔다. 妣 驪陽 陳氏는 始鑽의 女로 婦德을 갖추었는데 公을 純祖 庚辰年(一八二○)에 낳았다. 공은 성품이 簡重하고 才藝가 뛰어나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였다. 특히 글씨와 文章을 잘하여 十四세 때 童子로 科場에 들어가 그의 從舊( )를 위하여 試卷을 썼는데 合格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드날리게 되었는데 공은 만족하지 않고 餘事로 여겼다. 부모를 섬김에 뜻을 받들고 음식·의복을 갖추어 봉양하고, 병이 나시면 약을 맛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서울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웃에 함께 갔던 사람이 와서 공이 탄 배가 무거워 침몰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公의 부친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으면서, 『우리 아들은 그런 위헌함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얼마 후 아무 탈 없이 돌아왔으니, 그가 정성껏 부모를 섬기는 것을 이 일에서도 볼 수 있다. 부모 喪을 당하여서는 애통함을 다하고 喪葬를 예법대로 다하였고, 매년 부모의 忌日을 만나면 엄숙·공경을 다하였다. 庶母를 섬기면서도 즐겁게 하는데 힘썼다. 일찌기 과거에 응시했는데 친구가 풍습대로 뇌물을 쓰고 합격할 방도를 일러주었다. 공은 그 말을 듣지 않으면서, 『합격하고 못하고는 天命이니, 오직 내 실력을 닦을 뿐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出世에 마음이 없어 스스로 智隱이라 號하였는데, 사는 곳이 智異山 서쪽이기 때문에 그곳에 隱居하여 義를 行하려 함이었다. 집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어 사치스런 물건을 집에 두지 않았으며, 夫人을 和와 敬으로 대하고, 네 동생과 다섯 從兄弟와 한 마을에 살면서 우애와 和睦을 다하였다. 아들을 義方으로 가르치고 書籍을 많이 간직하였으며, 또 古人의 筆跡을 敬慕하여 옮겨 기록하였다. 衣冠은 항상 바르고 几案(궤안)은 반드시 청결하였으며, 玩樂을 멀리하고 집안일 때문에 구차하지 않았다. 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재물에 공평하였다. 마을 사람 가운데 혹 복부가 서로 싸우다가는 서로 그만두면서 말하기를, 有 『행여 趙公께서 알까 두렵다.』 하였으니, 공이 이웃과 마을의 모범이 된 것이 이처럼 많다. 太上 乙丑年 十二월, 병이 나서 子弟에게 『한결같이 학문에 힘쓰고 修身하라』 하고는 끝내 다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달 二十四일 卒하니, 享年은 一甲子하고 二백 七十六일이다. 谷城 長星洞 案山 乾坐에 장사하였다. 夫人 慶州金氏의 아버지 諱는 星大인데 鷄林君 金(稛)의 후예이다. 부인은 시부모를 孝順으로 섬기고 남편을 부지런과 민첩함으로 받들었다. 시누이와 동서와 화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며 子女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가르쳤다. 한번은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夫人의 神主에는 이름을 쓰는 것이 禮라 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내 이름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내가 圓衫을 만들어 죽은 뒤에 입으려 하였다. 그런데 오색 찬란한 것이 未亡人에게 적당하지 않을 것 같은데, 禮儀있는 집안에서는 深衣를 男女가 함께 사용한다고한다.』 하고 큰며느리를 시켜 즉시 深衣를 만들게 하였다. 이런 일은 부인의 天性이 그래서 그렇기도 하지만 公이 집안을 잘 다스린 효과이기도 하다. 부인은 공보다 二년 후에 出生하여 공보다 三十년 뒤에 卒하니, 장례는 魯人의 禮처럼 하였다. 四남 二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永鐸·永仁·永學·永一인데, 永學은 叔父에게 出系하였으며, 딸은 李正宇와 鄭淵學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長房(큰아들)의 아들은 東祐이며, 次房의 아들은 東夏·東殷·東周이며, 過房(永學)은 아들이 없어 東殷이 후사가 되었고, 季房의 아들은 東協·東憲·東勉이다. 曾孫·玄孫 이하는 다 적지 못한다. 아, 공은 容儀가 端正하고 행동이 安詳하여 大人長者의 風貌가 있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갔으며,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德을 좋아하고 恒心이 있는 선비임을 알았다. 더구나 永學氏는 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東夏는 家業을 이어 謹節하고 있으니, 가위 公의 뜻을 이루었다 하겠다. 그러니 공의 행적을 어찌 기록하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리산은 높고 智山磅礴 요천 물 맑은데 蓼水澄泓 우리 조공은 允矣趙公 효우집안으로 소문났네。 孝友家聲 그 덕행 누구와 짝할까 伊誰與儔 천년 전 동생이네。 千載董生 근본은 스스로 심었으나 植本自躬 그 후손 창성하네。 厥后彌昌 아、 우리 조공은 嗚呼趙公 영원히 죽지 않았네。 可謂不亡 月星 金在洪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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